오랫만에 서울을 나갔다왔다.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를 보기위해서다.
이런얘기 저런얘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시간은 훌쩍지나갔고 아쉬운 만남을 뒤로한 채 돌아오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막차 시간이 다 되었지만 여전히 버스는 만원이였고 10여명의 사람들은 1시간가량의 거리를 서서 가야하는 상황이였다. 고속도로를 타기 바로전 정거장에서 한 남자가 버스에 올랐는데 마침 내 옆에 앉은 사람이 내리려고 준비를 한다.
몇 정거장 전부터 타고온 사람들이 다들 서 가는것을 보고도 내리려고 준비하는 사람을 보자 그 앞으로 비집고 들어와 좁은자리를 떡하니 자리잡고 움직이지를 않는다.
내 옆자리 사람은 다음정거장에서 내렸고 먼저 서있던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일 없이 바로 자리에 앉는다.
속으로는 '이런 양심없는 사람 같으니..' 하고 눈을 흘겼지만 이 사람은 안하무인이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서는 전화기를 들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 약간 꼬부라진 목소리를 들으니 좀 취해있었다. 시간은 11시를 조금 넘은 시간이였고 전화내용이 참 가관이였다.
'여보세~요. 어 내가.. 술을 좀 마셨는데.. 30분뒤에.. 잠들지도 모르니까.. 30분뒤에..'
전화기 저편에서는 어느 여성의 목소리가 쟁쟁쟁 울린다.
'아니 자기야! 쳐먹다니.. 술을 드셨다고 하지 못할망정.. 먹은거지 쳐먹은게 뭐야..'
전화기를 통해 울리는 목소리는 여전히 왱왱왱.
한참을 가만히 듣고 있던 남자가 갑자기 전화기를 귀에서 떼고 입 앞으로 천천히 가져가더니 짧고 굵게 한마디 한다.
'야! 이런 무식한 x아..' 하고는 황급히 종료버튼을 누르고 바로 잠들어버린다.
만원 버스에서 크게 웃을수 없었지만 너무 재밌는 상황이라 입을 막고 킥킥거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추석이라 가족들을 위해 선물상자 하나를 들고 가는 남자.
날마다 북적거리는 만원버스 속의 늦은 퇴근길의 남자.
원하든 원하지 않던 참석해야 하는 잦은 술자리.
잠들면 내릴곳을 지나칠것 같아서 아내에게 부탁을해보지만 돌아오는건 날카로운 비수섞인 잔소리.
어쩌면 그 모습이 전 시대를 살아왔던 우리들의 아버지, 아니 이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을 보는것 같아 자조섞인 씁쓸한 웃음이였는지도 모른다.
6/24/2011
결정
▶◀
만나뵌적은 없지만 참 좋은 분께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
먼저 좋은 곳으로 가신 그분 어머님께 인사를 드립니다.
좋은 기억만 간직하시고 안녕히 가십시요.
▶◀
오래전 아버지가 돌아가실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갑자기 위독해 지셔서 응급실로 실려가셨고, 연락을 받고 한걸음에 달려가 본 아버지는 반 의식이 없는 상태셨다.
의사는 우리를 불러 지금 삽관술을 한다면 생명 연장이 가능하지만 그대로 둘 경우 하루를 못 넘기실거라고 했다. 하지만 삽관술을 하게 된다면 강제 수면상태로 중환자실로 옮겨지고 하루에 두번 면회만 가능하다고 했다.
살면서 이런 순간, 이런 결정을 해야하는건 늘 두려운일이다. 나의 결정에 의해 어떤 존재의 상태가 변화되어 버리는 것, 어쩌면 영원히 잃어버리거나 못보게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는게 전능한 결정권을 가진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하지만 망설일 시간도 없었다. 혈관을 찾기위해 손이고 발이고 관자놀이를 다 찔렀는데도 혈관은 잡히지 않았고 마지막으로 사타구니의 정맥에 주사바늘을 찌르고 있는 순간이였으니까 당장 어떤 조치를 취해야 했다.
이렇게 보내 드릴수는 없는데.. 하는 생각에 혼란스러웠지만 우린 삽관술을 안하기로하고 아버지 옆을 지키고 있었다.
다행히 그 이후 호흡이 조금 안정되시며 정신을 차리셨고 병실로 옮긴 후 우리들과 며칠동안 이야기도 하면서 계셨다. 그리고는 어느날.. 가셨다. 응급실에 실려 오신지 일주일도 안되었을 때다.
평생 깔끔한 분이라 마지막 숨이 차오르는 순간에도 스스로 용변을 보시고 돌아와 자리에 누우셨는데... 뚜뚜뚜뚜 뚜~~~~~~ vital sign도, 모든 기계장치도 멈췄다. 그것이 끝이였다.
지금은 오래전 일이라 담담하게 말할수 있다. 만약 그때 삽관술을 했다면 어쩌면 지금도 아버지는 살아 계셨을지도 모른다. 중환자실에서 깨어나지 않은 상태로..
하지만 우린 아버지와 같이 호흡하고 이야기 할 수 있었던 그 일주일이라는 시간에 감사한다.
아버지도 그런 우리를 이해하셨으리라 믿고싶다.
누구나 살다보면 어떤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은 원하던 원하지않던 생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결정에 대한 후회는 지울수 없는 문신처럼 평생 따라다닌다. 그것이 잘한 결정이든 잘못된 결정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만나뵌적은 없지만 참 좋은 분께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
먼저 좋은 곳으로 가신 그분 어머님께 인사를 드립니다.
좋은 기억만 간직하시고 안녕히 가십시요.
▶◀
오래전 아버지가 돌아가실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갑자기 위독해 지셔서 응급실로 실려가셨고, 연락을 받고 한걸음에 달려가 본 아버지는 반 의식이 없는 상태셨다.
의사는 우리를 불러 지금 삽관술을 한다면 생명 연장이 가능하지만 그대로 둘 경우 하루를 못 넘기실거라고 했다. 하지만 삽관술을 하게 된다면 강제 수면상태로 중환자실로 옮겨지고 하루에 두번 면회만 가능하다고 했다.
살면서 이런 순간, 이런 결정을 해야하는건 늘 두려운일이다. 나의 결정에 의해 어떤 존재의 상태가 변화되어 버리는 것, 어쩌면 영원히 잃어버리거나 못보게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는게 전능한 결정권을 가진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하지만 망설일 시간도 없었다. 혈관을 찾기위해 손이고 발이고 관자놀이를 다 찔렀는데도 혈관은 잡히지 않았고 마지막으로 사타구니의 정맥에 주사바늘을 찌르고 있는 순간이였으니까 당장 어떤 조치를 취해야 했다.
이렇게 보내 드릴수는 없는데.. 하는 생각에 혼란스러웠지만 우린 삽관술을 안하기로하고 아버지 옆을 지키고 있었다.
다행히 그 이후 호흡이 조금 안정되시며 정신을 차리셨고 병실로 옮긴 후 우리들과 며칠동안 이야기도 하면서 계셨다. 그리고는 어느날.. 가셨다. 응급실에 실려 오신지 일주일도 안되었을 때다.
평생 깔끔한 분이라 마지막 숨이 차오르는 순간에도 스스로 용변을 보시고 돌아와 자리에 누우셨는데... 뚜뚜뚜뚜 뚜~~~~~~ vital sign도, 모든 기계장치도 멈췄다. 그것이 끝이였다.
지금은 오래전 일이라 담담하게 말할수 있다. 만약 그때 삽관술을 했다면 어쩌면 지금도 아버지는 살아 계셨을지도 모른다. 중환자실에서 깨어나지 않은 상태로..
하지만 우린 아버지와 같이 호흡하고 이야기 할 수 있었던 그 일주일이라는 시간에 감사한다.
아버지도 그런 우리를 이해하셨으리라 믿고싶다.
누구나 살다보면 어떤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은 원하던 원하지않던 생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결정에 대한 후회는 지울수 없는 문신처럼 평생 따라다닌다. 그것이 잘한 결정이든 잘못된 결정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4/28/2011
[음악] 할머니의 마음은 바다처럼 넓어라
나에게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아주 작은 조각뿐이다. 물론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태어나기 전, 내 아버지가 돌이되기 전에 돌아가셨으니 당연히 기억이 있을 수 없다.
할머니에 대한 아주 작은 조각의 기억 역시 반쪽뿐이다. 친할머니 역시 돌아가셨는지 도망가셨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아버지를 키워주신 분은 어느 절의 보살님이셨다고 들었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 그 분이 계신곳을 수소문해서 찾아갔지만 이미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셨던 아버지의 기억이 남아있을 뿐이다. 아버지는 이제 어느정도 먹고 살만큼 자리를 잡았고 아들 3명이나 있다는걸 보살님께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였을게다.
그래서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반쪽뿐이라는 것은 외할머니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아직 내 기억에 외할머니의 얼굴은 남아있고 어릴적 일년에 한두번 뵐때면 늘 내 엉덩이를 토닥거리시며 '에구. 내 새끼' 하시던 모습이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그리 할머니에 대해 호의적이지 못했다.
아마도 사람은 자주봐야지만 좋아지고 정이 드는 이유가 아닐런지.. 아니면 지금처럼 내가 사람에 대한 정 붙임이 어려웠을수도..
가끔 Lucid Fall의 이 노래를 들을때면 나에게 다시 할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아니 어쩌면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잠들기전 이어폰을 통해 부드럽게 전해지는 따뜻함에 눈물이 흐른다.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동경, 수 많은 그리움들이 사무치는 하루다.
<할머니의 마음은 바다처럼 넓어라, Lucid Fall>
초겨울 추위도 무시 못할만큼 매섭던 나의 어린 바닷가
여름엔 바지락 겨울엔 굴을 따다 채운 가난한 호주머니
시골의 장터 오늘은 일요일 해뜨기 한참도 전 대야를 이고 향하는
할머니의 꿈 우리 건강한 꿈 빌고 또 비는 할머니의 꿈
채 익지도 않은 300원짜리 수박에도 우린 기뻐했었지
몹시 아프던 날 나를 들쳐업고 달리던 땀에 젖은 등자락
이제 난 알지 돌아가셨어도 나에게 누나에게 살아있음을
어머니 아버지에게서 숨쉬는 할머니의 마음은 바다처럼 넓어라
시골의 장터 오늘은 일요일 해뜨기 한참도 전 대야를 이고 향하는
할머니의 꿈 우리 건강한 꿈 빌고 또 비는 할머니의 꿈
할머니의 꿈 우리 건강하도록 빌고 또 비는 할머니의 꿈
할머니의 마음은 바다처럼 넓어라
할머니에 대한 아주 작은 조각의 기억 역시 반쪽뿐이다. 친할머니 역시 돌아가셨는지 도망가셨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아버지를 키워주신 분은 어느 절의 보살님이셨다고 들었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 그 분이 계신곳을 수소문해서 찾아갔지만 이미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셨던 아버지의 기억이 남아있을 뿐이다. 아버지는 이제 어느정도 먹고 살만큼 자리를 잡았고 아들 3명이나 있다는걸 보살님께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였을게다.
그래서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반쪽뿐이라는 것은 외할머니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아직 내 기억에 외할머니의 얼굴은 남아있고 어릴적 일년에 한두번 뵐때면 늘 내 엉덩이를 토닥거리시며 '에구. 내 새끼' 하시던 모습이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그리 할머니에 대해 호의적이지 못했다.
아마도 사람은 자주봐야지만 좋아지고 정이 드는 이유가 아닐런지.. 아니면 지금처럼 내가 사람에 대한 정 붙임이 어려웠을수도..
가끔 Lucid Fall의 이 노래를 들을때면 나에게 다시 할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아니 어쩌면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잠들기전 이어폰을 통해 부드럽게 전해지는 따뜻함에 눈물이 흐른다.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동경, 수 많은 그리움들이 사무치는 하루다.
<할머니의 마음은 바다처럼 넓어라, Lucid Fall>
초겨울 추위도 무시 못할만큼 매섭던 나의 어린 바닷가
여름엔 바지락 겨울엔 굴을 따다 채운 가난한 호주머니
시골의 장터 오늘은 일요일 해뜨기 한참도 전 대야를 이고 향하는
할머니의 꿈 우리 건강한 꿈 빌고 또 비는 할머니의 꿈
채 익지도 않은 300원짜리 수박에도 우린 기뻐했었지
몹시 아프던 날 나를 들쳐업고 달리던 땀에 젖은 등자락
이제 난 알지 돌아가셨어도 나에게 누나에게 살아있음을
어머니 아버지에게서 숨쉬는 할머니의 마음은 바다처럼 넓어라
시골의 장터 오늘은 일요일 해뜨기 한참도 전 대야를 이고 향하는
할머니의 꿈 우리 건강한 꿈 빌고 또 비는 할머니의 꿈
할머니의 꿈 우리 건강하도록 빌고 또 비는 할머니의 꿈
할머니의 마음은 바다처럼 넓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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