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9/2014

전주 한옥마을 3부

<안도현 시인이 극찬한 혼자 가끔씩 펼쳐보고 싶은’, 화암사>
돌아오는 길, 시간적 여유가 조금 있다면, 아니 일부러 시간을 내서라도 1시간 거리 불명산에 위치한 잘 늙은 절화암사에 가보길 권한다.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수도했다고 전해지는 좁은 산기슭에 자연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고 조화를 이룬 모습이 그 어떤 수식어로도 형용하기 어렵다. 특히 바람이 찰 때 울리는 풍경소리가 산사를 가득 메우는 것만으로도 속세의 고단함을 풀어준다. 전주가 소리의 고장이 된 이유를 찾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말할 수 있을 만큼의 아름다움이다.
『화암사가 그러하다. 어지간한 지도에도 그 존재를 드러내고 밝히기를 꺼리는, 그래서 나 혼자 가끔씩 펼쳐보고 싶은, 작지만 소중한 책 같은 절이다. 십여 년 전쯤에 우연히 누군가 내게 귓속말로 일러주었다. 화암사 한번 가보라고, 숨어 있는 절이라고, 가보면 틀림없이 반하게 될 것이라고.
<잘 늙은 절, 화암사 중에서/안도현 시인>


<<< 여행정보 tip

손맛 좋기로 유명한 전라도라 대부분 식당이 기본적으로 깊고 진한 맛을 가지고 있지만, 아침 해장을 생각한다면 콩나물국밥(삼백집(063-284-2227), 왱이집(063-287-6980))이 제격이다. 전주에 왔으니 전주비빔밥(성미당(063-287-8800), 한국관(063-272-9229))은 필수코스다.전주에서 특별한 밤을 원한다면 삼천동 막걸리 골목이나, 숙소 근처 슈퍼에서 연탄불에 구운 부드러운 황태구이에 가맥을 경험해 보는 것도 색다를 것이다
문화의 도시라는 명성에 걸맞게 다양한 문화체험 시설도 많다. 아이들이 있다면 전주제지에서 운영하는 한지박물관(063-210-8103)에서 한지 만들기 체험이나 한옥마을 작은 공방에서 도자기 체험을 하는 것도 좋겠다. 술을 좋아한다면 전통술박물관(063-287-6305)에서 가양주에 관련된 해설을 들으며 낮술 한잔을 하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가 될 것이다

8/28/2014

전주 한옥마을 2부

<골목골목 주전부리, 막걸리 예찬>
어느 고장을 가더라도 대표 음식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전주는 조금 다르다. 꼭 먹어야 할 음식이 아니라 먹고 싶은 음식이 많아도 아주 많다. 그 중 몇 가지만 꼽아보라면 주저 없이 전주비빔밥과 콩나물해장국을 꼽는다. 막걸리도 빠질 수 없다.

먼저 전주비빔밥을 보면 그릇부터 눈에 들어온다. 놋그릇이다. 온도가 65도인데, 이 온도는 밥의 최적온도이고, 재료의 향이나 신선도가 가장 잘 유지되는 온도이다. 따라서 비빔밥 고유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온도다. ‘전주비빔밥이 만나 전주비빔밥이라는 보통명사화가 되었고, 이런 섬세함으로 전주비빔밥은 이제 명실공이 세계적인 음식이 되었다. 모양새는 어떠한가. 동서융합이 된 조화로운 모습이다. 후백제 이후 천년고도를 이루었고, 지금은 잊혀진 기억일지라도 그 영광의 역사를 애써 되찾으려 하지 않는 전주 사람들이다. 또한 동학혁명의 중심지였지만 결코 과격하지 않다. 오랜 기다림 끝에 반드시 나서야 하는 일에만 나섰던 정의로운 사람들이다. 그게 전주고 그 사상 속에서 전주비빔밥이 나오게 된 것이다.
전주천을 내려다보고 있는 한벽당
콩나물국밥은 또 어떠한가. 전주콩나물국밥이 맛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콩나물에 있다. 보통 콩나물은 대두를 사용하여 크기만 크고 밍밍한 맛이지만, 전주콩나물국밥에 들어가는 콩나물은 쥐눈이콩을 사용하여 작고 가늘지만, 고향 툇마루에서 키운 듯 씹을수록 고소함이 느껴진다. 콩나물 국밥과 함께 수란이 나오는 것도 전주만의 특징이다. 전날 숙취가 남아있다면 모주를 한 잔하는 것도 좋다. 막걸리에 8가지 한약재를 넣어 끓인 모주는 알코올이 거의 없어 술이라기보다 숙취 해소용 건강음료에 가깝다.
온종일 전주의 맛과 멋에 흠뻑 빠졌다면 해거름이 내려앉는 시간, 막걸리집으로 향해보자. 전주 막걸리집은 통영 다찌집, 마산 통술집과 더불어 서민들의 사랑과 애환이 담긴 대폿집이다. 한 주전자를 시킬 때마다 입맛을 돋우는 안주가 한 상 가득 차려진다. 아기자기하고 예쁜 것을 기대했던 사람은 실망할지도 모르지만 이른 실망은 금물이다. 투박하지만, 정감 있고 맛깔 난 음식들이 눈보다는 혀를 즐겁게 해 줄 테니 말이다.
술을 마시는 이유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마다의 사연이 있을 터. 누군가는 행복해서, 누군가는 슬퍼서, 또 누군가는 이 사회가 술을 권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칼칼한 목을 시원하게 적시며 내려가는 한잔 막걸리에 어떤 의미를 두는 게 이상할 수도 있지만, 스스로 슬쩍 대답해본다. '잊기 위해서'라고…….
전주 막걸리를 마시면 네 번 취한다. 한번은 흥에, 두 번은 안주에, 세 번은 맛에, 그리고 마지막에는 정에 취한다. 그래서 술은 풍류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전주는 그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살 내음을 맡을 수 있는 공간이다.

8/27/2014

전주 한옥마을 1부


벚꽃이 봄눈처럼 쏟아졌다. 이 봄을 채 느끼기도 전에 말이다. 봄과 어울리는 도시가 있다면 아마도 따뜻하고 아기자기한 문화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곳, 다양하고 푸짐한 전라도 손맛을 볼 수 있는 곳이 아닐까? 전주라면 맞춤한 듯 봄과 잘 어울리겠다. 문명의 이기에 취해 자기만의 색을 잃고 알록달록 똑같은 모습으로 변해가는 다른 도시와 다르게 본연의 모습을 간직하며, 느리지만 결코 뒤처지지 않는 도시, 전주를 만나러 간다.


<오래된 미래를 품은 고목들의 속삭임, 한옥마을>
은행나무는 전주의 상징 나무다. 수명이 길고 곧게 자라며, 벌레를 많이 타지 않는 은행나무가 전주를 대표하는 건 낯설지 않다. 왜냐하면, 일찍이 한지와 유학의 발달로 문화와 교육이 뿌리 깊은 역사와 궤를 같이하기 때문이다.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전주향교 마당에는 400년 된 은행나무가 무려 네 그루나 있으니 말이다
여기에 귀한 나무가 하나 더 있다. 한옥마을 은행로에 600년을 살아온 은행나무다. 그 고즈넉함은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깊이가 있어, 보는 이의 마음까지 경건하게 만든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있다. 고목 가까이서 살펴보면 바로 곁에 10년 남짓 된 은행나무가 자라고 있다. 일반적으로 나무는 가까이 심지 않는다. 두 나무 모두 튼튼하게 자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600년이나 된 보호수 곁에 눈치 없이 자라고 있는 나무. 어지간히 눈에 거슬린다. 뽑아버리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이 나무도 사연이 있다. 보호수의 맹아묘. , 씨앗에서 자란 게 아니라 어미나무의 뿌리에서 자라난 고목의 분신인 것이다. 어미의 살갗을 트고, 굳은 땅을 힘차게 뚫고 나온 맹아묘라 하니 어미나무만큼이나 당당하게 보인다. 어쩌면 몇십 년 후 혹은 몇백 년 후 어미나무가 쓰러지는 날이 올 때 곁에서 임종을 지켜보기 위해 자라난 듯하여 더욱 대견해 보인다. 맹아묘는 어미의 위용을 그대로 후세에 전할 것이다. 가만히 다가가 살짝 손을 얹어본다.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나무보다 못한 우리의 모습이 떠올라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두 나무 모두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주길 바라며 한옥마을 가장자리에 위치한 나지막한 동산, 오목대로 발길을 돌린다. 오목대 정상은 한옥마을의 가지런한 기왓장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공간이다. 황산대첩에서 왜구를 물리친 조선 태조 이성계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주의 종친들과 승전 잔치를 벌인 곳으로 유명하고, 이곳에서 유방의 대풍가를 부르며 새 나라를 열고자 하는 꿈을 알렸다고 한다. 오목대를 오르는 중턱에는 500년 세월 한옥마을을 굽어보고 있는 당산나무가 있다. 마을의 평화와 안녕을 지켜온 나무다. 문득 나뭇가지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당시 고뇌하던 태조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어찌할꼬. 이 피비린내를… … 과연 나라를 위한 것이냐? 아니면 역적이냐?’ 이렇게 태조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하지만 우리의 역사를 살펴보면 권력을 위해 손에 피를 묻힌 경우가 유독 많았음을 생각하니 그리 유쾌한 상상만은 아닌듯하다. 최근에는 이 당산나무 아래서 사랑을 소망하면 이루어진다 하여 수많은 소원지가 빼곡하게 끼워져 있다. 비록 소원지를 적지는 못했지만 마음속으로 앞으로의 역사는 평화롭기를 기원해 본다.
사방이 트인 오목대에서 무뎌진 방향감각을 되찾아 이번에는 경기전을 향해보자. 경기전은 조선왕조의 태반이라 할 수 있다. 태조의 어진이 봉안되어 있고, 임진왜란 당시 유일하게 남은 전주사고가 있다. 만약 전주사고마저 짓밟혔다면 지금의 조선왕조실록은 아마도 구전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이다. 경기전 내에서는 지조와 인내, 절개를 의미하는 대나무와 기품과 품격을 상징하는 매화나무가 반갑게 맞아준다. 그중 유독 눈에 띄는 나무가 하나 있는데, 바로 등 굽은 매화나무다. 혹자는 누워서 잠을 자는 것 같다지만, 위아래로 휘어진 모습이 용의 모습을 닮았다 하여 용매라 부르는 게 더 어울린다. 하지만 실상은 기나긴 세월 모진 풍파에 치이고 짓밟혀 허리는 굽었고, 가녀린 줄기는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위태로워 보인다. 그래도 꿋꿋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 모습이 경기전의 역사와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듯하다. 가지 끝을 살짝 잡으면 전해오는 떨림이 왠지 안쓰럽고 미안할 뿐이다
경기전 건너에는 호남 최초로 건립된 100년 역사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동성당이 자리한다. 주말이면 예식이 많아 행복한 사람들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같이 행복한 미소를 짓게 된다. 천주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살짝 성당에 들어가 짧은 기도를 드려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또한, 천 년의 시간 속에서 천주교도의 순교를 지켜보고, 동학 혁명군의 입성을 묵묵히 내려다본 풍남문도 그 세월의 흔적을 가늠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처럼 한옥마을은 볼거리, 들을거리가 많은 곳이다.


* 여행작가 학교 2차 과제 편집본

8/26/2014

[음악] 만약에 말야 -노을

내가 싫어하는 단어가 있다. '만약에'란 말이다. 그런 가정하는 일 없이 후회없이 살고자 한다.
그런데 이 노래를 듣다보면 나에게도 그 '만약에'가 허락된다면? 오늘 같은 날은 없었겠지.
쓸대없는 고민이지만, 긴 밤이다.


8/22/2014

행복한 날

특정한 날을 기념한다는 것은 아주 의미 있는 일이다.
누군가에게는 힘든 날이 되겠지만, 다른 누군가는 행복하기도 하듯이.

바로 오늘처럼!

8/20/2014

자업자득 (自業自得) (부제 : 검은 유골의 목소리 - 나는 해방되었는가)

검은 유골? 유골은 대부분 흰색이거나 회색일 텐데 검은 유골이라니? 지난 주말 저녁 우연히 보게 된 추적60분은 제목부터 궁금증을 자아낸다. 별생각 없이 보고 있자니 일제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였다. 그들 중 대다수가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었고,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국가가 힘이 없어 지켜주지 못한 국민들이고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형제자매들이다. 안타까운 과거사라고 생각했는데 내용을 보니 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무얼까 생각하게 만드는 프로그램이었다.
우리는 말로만 이들을 위한 추모제니 위령제를 지낸다. 형식적이다. 이런 형식적인 겉치레 말고 지금이라도 적극적인 발굴을 통해 이미 주검이 되어 유골만 남은 분들을 모셔와야 하지 않을까? 이런 일은 개인적으로 추진하기 어렵기에 국가가 나서야 한다. 이역만리 타향으로 끌려간 힘없는 국민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다 죽었다. 그리고 그 억울함에 분통함에 아직도 눈 감지 못한 숱한 영혼들을 위해서라도 하루라도 빨리 말이다. 그리고 난 당연히 우리나라가 그렇게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방송을 보던 중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 정부는 이런 일에 관심조차 없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지나간 과거사라 여기고 방치하고 있다. 물론 한때 시도는 했다고 한다. 노무현 대통령 집권 시절에 고이즈미 총리와의 한일정상회담에서 정식 의제로 채택하고 강제징용자의 유골을 본국으로 봉환하기 위한 국가 차원의 조직을 만든 것이다. 이때만 해도 정부주도하에 활발한 발굴이 이루어져 2,700여 구의 유골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한일관계의 악화를 우려(?)하는 정권은 이 조직을 해체했다는 것이다. 스스로의 치부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일본으로서는 당연히 이후의 발굴에 적극적일 필요 없는 면죄부를 받은 것이다이것은 직무유기다. 국가가 책임져야 할 일임에도 전혀 손쓰지 않고 있는 것은 명명백백한 국가의 직무유기이다하루빨리 관련 조직을 다시 만들고 적극적으로 유골 봉환에 힘써야 한다. 그래야만 힘없는 나라에 태어난 자신에 대한 자책은 물론이요, 국민의 생명조차 지켜주지 못한 나라에 대한 원망이 조금이라도 사라지지 않을까? 아직도 서럽게 외치고 있는 억울한 영혼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이것은 아직 돌아오지 못한 유골에 대한 예의일 뿐 아니라 남아있는 그들의 후손들에게도 필요한 일이다. 그들의 고통과 억울함과 그리움이 하루빨리 사라질 수 있기를 바란다.




PS. 하지만 현재도 진행 중인 세월호 사고와 같은 일련의 사건사고에 대한 국가의 태도로 봐서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다른 현안들로 바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하고 있지 않는가? 정작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지도자를 가진 대한민국. 어쩌면 우리들 스스로의 무관심이 이 시대의 무서운 괴물들을 만들고 키우고 있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자업자득이다.

8/19/2014

Jamaica Blue Mountain Coffee

사무실 커피가 떨어졌다. 주문해야지 하면서 계속 까먹었다. 며칠을 인스턴트 커피로 버티고 있었는데 마침 좋은 커피를 선물 받았다. 스틱 형태인지라 인스턴트 커피라고 생각을 했는데 생각보다 향기가 아주 좋았다. 인스턴트 커피 봉지가 뜨거운 물에 닿으면 환경 호르몬이 나와 안 좋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이건 미국 FDA 기준에 맞게 만들어졌다고 하니 믿어볼까? 하지만 그래도 조금 찝찝하길래 봉지를 뜯어 머그잔에 담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진하게 우러나는 커피 향이 아주 좋다. 기분까지 좋아진다. 그런데 막상 마시려고 보니, 인스턴트가 아닌 분쇄한 원두커피가 아닌가? 적당한 필터가 없어 그냥 한 모금 마시려니 커피 알갱이가 입안에서 굴러다닌다. ㅠ
남은 몇 봉지의 맛있는 Jamaica Blue Mountain Coffee는 있는 그대로, 사용법 그대로 마시기로 하고 주신 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8/13/2014

서울, 조각을 맞추다 (부제 : 서울 한양도성 성곽길)

백사실계곡 올라기는 길
백사실계곡 별서터
첫 경험이었다. 누구에게는 설렜던 기억으로, 혹 누군가에게는 두려웠던 기억의 한 조각으로 아련하지만 깊이 묻어두었던, 가슴 뛰지만 숨겨두고 섣불리 꺼내보지 못하던 기억. 오늘 난 단조롭기만 한 세월의 흐름에 무뎌지고 굳어버린 조각들은 버리고 새로운 시간의 퍼즐을 맞췄다. 이것은 색다른 경험이다. 바로 서울에서 말이다.
40여 년 살아온 익숙한 서울이었기에 무엇 특별한 게 있을까? 전날 밤부터 고민했다. 이미 수십 번 파헤쳐지고 도려내어져 치부까지 드러낸 곳인데, 그 신음소리를 들으러 가야 하나? 그 마른 땅, 콘크리트 무덤에 내 슬픔 한 조각 내밀어 위로해야 하나?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또 단체여행이라고는 수학여행이 마지막인데, 조직 생활에 서툰 반사회적 인간인 내가 단체여행을 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워 보였다. 하지만 어떤 핑계도 찾지 못한 채 날이 밝았다. 어쩔 수 없었다. 일단은 부딪쳐 보자.


세검정에서 시작한 발걸음은 어릴 적 뛰놀던 동네의 모습과 흡사한 신영동 골목을 따라 이어지다 백사실계곡에서 잠시 숨을 돌린다. 계곡 주변에 주춧돌만 남아있는 별서터가 백사 이항복의 땅인지 추사 김정희가 머물던 곳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또 다른 괴물의 탄생을 예고하는 복원사업이 예정되어 있다는 소리가 가슴을 무겁게 만들 뿐이다.
혹자는 빈터만 남아있어 흉물스럽다고 하지만, 내 눈에는 고즈넉하고 평안하기만 하다. 조금 깨지고 삐뚤어져 있어도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하길 바란다. 물론 좋고 나쁨에 대한 판단은 개개인의 몫이지만, 보존과 개발의 줄다리기에서 너무나도 쉽게 부등식을 만들어버리는 정책들을 족히 백 년은 연못 터 곁을 지키고 있는 느티나무 아래 묻어버리고 싶은 마음뿐이다.
길을 재촉하며 북악스카이웨이를 따라 올라가는 동안 가능하면 평창동 쪽은 보지 않으려 애썼다. 수많은 콘크리트 무덤은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악팔각정에 도착했을 때 보이는 평창동은 내가 알고 있던 그런 메마른 땅이 아니었다. 그곳은 봄빛 가득 머금고, 푸른 초록으로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짧은 한나절을 보내는 동안 내 마음속 빗장은 조금씩 풀렸다. ‘서울은 이미 차갑게 죽었다는 마음속 조각은 하나둘 희미해지고, ‘서울은 아직 살아있다는 희망의 조각 하나가 생겼다. 그래 이제라도 살아있는 서울을 만나고자 한다. 어딘가에 조용히 숨죽이고 있을, 아직 따뜻한 온기를 머금은 서울을 찾아보자. 그때마다 만날 새로운 조각들은 아마도 내가 그토록 애타게 그리워하던 추억 속의 고향, 그런 서울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 여행작가 학교 1차 과제물 편집본

8/10/2014

무지개야 나와라~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춥다. 선선하다 못해 춥다. 요 며칠 사이의 날씨 얘기다. 지난주까지는 더워도 너무 더워 숨만 크게 쉬어도 땀이 줄줄 흘렀는데, 입춘이 지나서인지 아니면 태풍 할룽의 영향인지 기온이 크게 내렸다. 정말 한순간이란 표현이 적당할 정도로 말이다.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하다 못해 춥다는 소리가 절로 입에서 튀어나온다. 사람의 간사함이란...
오후부터 내리던 비가 저녁 무렵 얼추 그치는 듯싶더니 하늘색이 이상해졌다. 뭘까~ 하고 올려다본 하늘에는 무지개가 걸려있다. 근래 보았던 무지개 중 가장 크고 선명하다. 예쁘다.
그런데 난 왜 무지개만 보면 소원을 빌고 싶어 지는 걸까?

8/07/2014

[공지] 여행작가학교 12기 모집

가을이 오려나 보다. 어제보다 느껴진 더위가 한결 물러진 걸 보니 말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관심 있는 것만 본다. 굳이 심리학적인 면을 적용하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나 역시 관심분야가 많다. 그 중 하나를 꼽으라면 당연히 여행이다. 시간이 없다는 건 핑계일 뿐이다. 여행이란 굳이 멀리까지 가야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비행기를 타고 가야 여행이라고 하지만 그건 내 기준으로는 관광이나 휴양이다. 여행이란 언제 곤 그냥 훌쩍 떠나는 것이다. 예전에는 나를 찾으러 혹은 무언가 찾으려는 목적이었지만,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에게 여행이란 내가 가진 것을 조금씩 버리는 여행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관련글 긴 여행 )

아무튼 난 지금도 여행을 생각하고 있고 좋아한다. 그리곤 가끔 훌쩍 떠난다. 그런 나만의 여행을 즐기다가 어느 순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여행을 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의 내 방식의 여행과는 좀 다른 방법은 없을까? 라는 호기심에 우연히 알게 된 것이 '여행작가 학교'. 글 쓰는 재주가 없이 작가가 된다는 것은 과한 욕심이기에 반드시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또한, 여행작가라는 타이틀이 누군가에게는 설렘과 감성을 자극하지만 실상은 직업적으로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 물론 매력적이란 게 느끼는 방법이 다르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아무튼 나이 성별 직업을 떠나서 관심이 같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원한다면 수강해보시라.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순수하게 사람을 만날 기회는 그리 많지 않을 테니 말이다.



수강신청 팁!
1. 경쟁이 치열하다. 10시에 수강신청서가 올라오고 메일로 접수까지 5분 이내로 해야 한다. 따라서 이메일 창을 미리 열어두고 신청서 작성이 끝나자마자 attach하고 send를 바로 누를 것!
2. 빈칸이 있으면 안 되므로 없음이라고 써도 된다. ‘없음은 해당사항이 없을 뿐이지 빈칸이 아니다.
3. 혹시나 해서 이전 양식을 올린다. 양식이 매 기수 바뀌지만, 내용은 그리 차이 나지 않으므로 내용을 미리 작성해두고 COPY&PASTE 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è 여행작가학교 수강생 모집

8/06/2014

올챙이 추억 전시관

둔내에서 6번 도로를 따라 횡성 방향으로 차량 통행이 많지 않은 산길을 달린다. 창문을 열고 강원도의 상쾌한 바람을 맞으면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고 외치던 오래 전 광고카피가 떠오른다. 광고 삽입곡인 ‘Simon & Garfunkel The Boxer’를 틀어놓으면 드라이브가 더욱 운치 있겠지만, 불행히 앨범이 없다. 스마트폰으로 찾아 들으면 되지 않나 싶겠지만, 더 불행(?)하게도 난 아직 폴더 피처폰이고 2G 유저다.
한적한 도로를 굽이굽이 돌아내려 오다 보면 180도의 급커브 길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는 누구나 속도를 충분히 줄여야 한다. 속도계가 30 이하로 떨어질 때쯤, 정면에 나무로 만든 작은 입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올챙이 추억 전시관'
무얼까? 알에서부터 개구리가 되는 단계를 구분해 놓은 부화조가 있는 걸까? 아니 이건 계절의 영향이 있으니 어렵겠지. 그럼 실내 부화조? 아니면 그냥 개구리 종류를 박제해 둔 전시관? 간판에 적힌 이름만으로는 가늠할 수 없다. 어차피 속도는 줄였겠다, 궁금한 건 못 참으니 일단 한번 들어가 보기로 한다. 좁은 소로를 따라 500m 정도 달려가니 널찍한 터에 건물들이 몇 개 보인다. 입구에 주차를 해두고 들어서지만 내가 예상했던 곳이 아니다. 일단 유료다. 안내문을 보니 건물을 전시실로 활용하면서 7080세대가 사용하던 오래된 일상용품을 전시해 두고 있다. 입장료가 비싼 건 아니지만 굳이 7080세대인 내가 입장료까지 내고 교복이나 교련복을 입어보고 싶지는 않다. 일제의 잔재, 군부독재의 잔재라는 생각만으로도 썩 유쾌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을 위한 몇 가지 체험 프로그램도 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신기한 경험이 될지 모르겠지만 어른들에게 그리 감동을 주진 않는다. 어쨌든 그냥 가볍게 산보하듯 주변 경관만 둘러보기로 했다.

입구 한편에 꽤 너른 연못이 있다. 연꽃이 피는 7월이면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 장관일 것 같다. 연못 가운데 작은 섬까지 나무다리가 있어 건너갈 수 있게 해 둔 것은 운치 있어 좋다. 출렁이는 나무다리를 건너다 연못 바닥을 살펴보니 아이 주먹만 한 우렁쉥이가 보인다. 흔히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라 신기하기만 하다. 몰래 한 마리 잡아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든다. 복고풍이 유행이라 이런 전시관들이 주변에 많기는 하지만, 복잡하고 시끄러웠던 여름휴가에서 돌아오는 길이라면 한 번쯤 들려봐도 좋을 듯하다. 특히 아이들이 있다면 말이다.


주소 : 강원 횡성군 둔내면 궁종리 7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