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7/2014

전주 한옥마을 1부


벚꽃이 봄눈처럼 쏟아졌다. 이 봄을 채 느끼기도 전에 말이다. 봄과 어울리는 도시가 있다면 아마도 따뜻하고 아기자기한 문화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곳, 다양하고 푸짐한 전라도 손맛을 볼 수 있는 곳이 아닐까? 전주라면 맞춤한 듯 봄과 잘 어울리겠다. 문명의 이기에 취해 자기만의 색을 잃고 알록달록 똑같은 모습으로 변해가는 다른 도시와 다르게 본연의 모습을 간직하며, 느리지만 결코 뒤처지지 않는 도시, 전주를 만나러 간다.


<오래된 미래를 품은 고목들의 속삭임, 한옥마을>
은행나무는 전주의 상징 나무다. 수명이 길고 곧게 자라며, 벌레를 많이 타지 않는 은행나무가 전주를 대표하는 건 낯설지 않다. 왜냐하면, 일찍이 한지와 유학의 발달로 문화와 교육이 뿌리 깊은 역사와 궤를 같이하기 때문이다.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전주향교 마당에는 400년 된 은행나무가 무려 네 그루나 있으니 말이다
여기에 귀한 나무가 하나 더 있다. 한옥마을 은행로에 600년을 살아온 은행나무다. 그 고즈넉함은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깊이가 있어, 보는 이의 마음까지 경건하게 만든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있다. 고목 가까이서 살펴보면 바로 곁에 10년 남짓 된 은행나무가 자라고 있다. 일반적으로 나무는 가까이 심지 않는다. 두 나무 모두 튼튼하게 자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600년이나 된 보호수 곁에 눈치 없이 자라고 있는 나무. 어지간히 눈에 거슬린다. 뽑아버리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이 나무도 사연이 있다. 보호수의 맹아묘. , 씨앗에서 자란 게 아니라 어미나무의 뿌리에서 자라난 고목의 분신인 것이다. 어미의 살갗을 트고, 굳은 땅을 힘차게 뚫고 나온 맹아묘라 하니 어미나무만큼이나 당당하게 보인다. 어쩌면 몇십 년 후 혹은 몇백 년 후 어미나무가 쓰러지는 날이 올 때 곁에서 임종을 지켜보기 위해 자라난 듯하여 더욱 대견해 보인다. 맹아묘는 어미의 위용을 그대로 후세에 전할 것이다. 가만히 다가가 살짝 손을 얹어본다.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나무보다 못한 우리의 모습이 떠올라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두 나무 모두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주길 바라며 한옥마을 가장자리에 위치한 나지막한 동산, 오목대로 발길을 돌린다. 오목대 정상은 한옥마을의 가지런한 기왓장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공간이다. 황산대첩에서 왜구를 물리친 조선 태조 이성계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주의 종친들과 승전 잔치를 벌인 곳으로 유명하고, 이곳에서 유방의 대풍가를 부르며 새 나라를 열고자 하는 꿈을 알렸다고 한다. 오목대를 오르는 중턱에는 500년 세월 한옥마을을 굽어보고 있는 당산나무가 있다. 마을의 평화와 안녕을 지켜온 나무다. 문득 나뭇가지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당시 고뇌하던 태조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어찌할꼬. 이 피비린내를… … 과연 나라를 위한 것이냐? 아니면 역적이냐?’ 이렇게 태조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하지만 우리의 역사를 살펴보면 권력을 위해 손에 피를 묻힌 경우가 유독 많았음을 생각하니 그리 유쾌한 상상만은 아닌듯하다. 최근에는 이 당산나무 아래서 사랑을 소망하면 이루어진다 하여 수많은 소원지가 빼곡하게 끼워져 있다. 비록 소원지를 적지는 못했지만 마음속으로 앞으로의 역사는 평화롭기를 기원해 본다.
사방이 트인 오목대에서 무뎌진 방향감각을 되찾아 이번에는 경기전을 향해보자. 경기전은 조선왕조의 태반이라 할 수 있다. 태조의 어진이 봉안되어 있고, 임진왜란 당시 유일하게 남은 전주사고가 있다. 만약 전주사고마저 짓밟혔다면 지금의 조선왕조실록은 아마도 구전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이다. 경기전 내에서는 지조와 인내, 절개를 의미하는 대나무와 기품과 품격을 상징하는 매화나무가 반갑게 맞아준다. 그중 유독 눈에 띄는 나무가 하나 있는데, 바로 등 굽은 매화나무다. 혹자는 누워서 잠을 자는 것 같다지만, 위아래로 휘어진 모습이 용의 모습을 닮았다 하여 용매라 부르는 게 더 어울린다. 하지만 실상은 기나긴 세월 모진 풍파에 치이고 짓밟혀 허리는 굽었고, 가녀린 줄기는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위태로워 보인다. 그래도 꿋꿋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 모습이 경기전의 역사와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듯하다. 가지 끝을 살짝 잡으면 전해오는 떨림이 왠지 안쓰럽고 미안할 뿐이다
경기전 건너에는 호남 최초로 건립된 100년 역사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동성당이 자리한다. 주말이면 예식이 많아 행복한 사람들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같이 행복한 미소를 짓게 된다. 천주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살짝 성당에 들어가 짧은 기도를 드려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또한, 천 년의 시간 속에서 천주교도의 순교를 지켜보고, 동학 혁명군의 입성을 묵묵히 내려다본 풍남문도 그 세월의 흔적을 가늠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처럼 한옥마을은 볼거리, 들을거리가 많은 곳이다.


* 여행작가 학교 2차 과제 편집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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