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8/2011

귀신 << 2부

설악산에 가면 늘 하룻밤 묵는 곳이 있는데 바로 양폭산장이다. 천장이 낮아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야 하는 불편한 돌집인데 그 곳에 가면 늘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이 없다는 말처럼..
눈이 많이 내린 겨울날, 거의 해가 질무렵 도착한 산장에서 난 서둘러 저녁 준비를 해야했지만 그곳에 계신분들이 이미 차려놓은 식사를 같이 나누자고 하셨다. 산에서는 이런 초대가 비일비제 하니 감사한 마음으로  모여앉아 식사를 함께 했다. 소주 한잔도 자연스럽게 돌려 마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9시가 지나고 있었다.
다음날의 일정들이 있기에 산에서의 술자리는 일찍 끝난다. 모두들 잠자리로 돌아가는 사이 난 산장 옆으로 나와 담배 한개피에 불을 붙였다.
차가운 겨울 공기속에서 뜨거운 연기 한모금을 토해내며 아주 밝고 하얀달이 하얀 눈으로 덮인 사방을 아름답게 비춰주는 장관을 둘러보는데 어디선가 소리가 들린다. 가려린 피리소리였다.
깊은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려니 생각했는데 아주 또렷한, 귀에 익은 소리다. 자연스럽게 산장 건너편 만경대를 바라보게 되었고 잊고 있었던 그 연두색 존재가 만경대 꼭대기에 걸터 앉아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무 반가워 그것이 귀신일지라도 난,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잊고 있던 존재였기에 더 더욱 반가웠다.
아주 잠깐동안이였지만 오랫동안 보아온 친구처럼 난 그 존재를 바라보며 그 피리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그 소리가 뚝 끊기고 그 연두색 존재는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도 손을 뻗으면 만져질만큼 가까이 느껴졌는데 그 손이 나를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고 그 존재는 이미 사라졌다. 눈을 크게 뜨고 아무리 만경대 꼭대기를 올려다 보고 주위를 둘러보아도 없었다. 그렇게 또 가버렸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몸이 너무 추웠다. 들어가야한다는 생각이 가득해서 저절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내 손에는 아까 한모금 빨아들이고만 담배가 그대로다. 시계를 보니 11시가 다 되었다. 휴~~
산장에 들어오니 다들 깊은 잠에 취해있었고 난 차가워진 몸을 침낭에 눕히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이른 시간부터 산장은 시끌벅적했다. 무슨일인지 밖에 나가보았을때 난 뜻밖의 사건을 보았다. 산장 옆으로 눈사태가 나서 올라가는 길이 막혀버린 것이다. 산장지기의 말로는 어제밤에 눈사태가 났다고 했다. 다들 일찍 잠들지 않았으면 큰일날뻔 했다고..
그런데, 그런데 눈사태로 모두 덮여버린 그곳이 내가 어젯밤 서있던 바로 그곳이였다!

세월이 한참 지났고 두번 다시 그 연두색 존재를 본적은 없다. 하지만 그날 그 장소에서 나에게 손짓해 준 그 존재는 무엇이였을까 생각해본다.
혹시 나를 수호하는 정령? 아니면 우연과도 같이 잠시 스쳐지나간 귀신? 나만의 착시?
그 존재가 무엇인지 알수는 없지만 난 이렇게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자신을 보호해주는 존재가 분명 있다고..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아직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언제 어느곳에서든 자신을 보살펴주는 존재는 반드시 있다고. 그것이 나에게만 보이는 존재일수도 있고 아니면 내 주변에 매일같이 마주하는 사람일수도 있다.
아무튼 내가 만났더 그 존재를 다시 만날수 있을거라는 생각은 안하지만 언제가되든 꼭 한번 보고싶다.

귀신이란 단지 연약한 자기 자신과의 대면이라 생각한다. 혼란속 내 젊은날의 경험처럼...

▶▶ 1991년 양폭산장. 오른쪽에서 쓸려내려온 눈들이 계곡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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